9oC의 전자음악 史 _ since 1992

아웃사이더 음악. 241127 매물쇼의 유시민씨의 이야기를 들으며

시스나인 2024. 11. 28. 17:21

오늘은 제가 음악을 만들면서 큰 영향을 준 거대한 사회적 이야기를 하나 해볼 까 합니다.

 

20대 인터넷이 아닌 컴퓨터 통신에 한참 글을 적던 시절입니다. 이제는 이 일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몇이나 될지 모르겠지만, 2002년 월드컵이 한참 열리던 시절, 우리나라에는 집회가 하나 있었습니다.

미선이, 효순이

중학생 둘이 미군 장갑차에 깔려 시신을 알아보지도 못할 만큼 짓이겨졌지만, SOFA 협정에 의해 그 미군들에 대해서 합당한 사과나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았죠.

출처 : 나무위키

물론 그 이후 피의자였던 미국이 죄책감에 괴로워한다는 것이 방송을 통해 방영이 되기도 했습니다만, 전 오래전 방송이 가진 가식과 조작을 20대에 경험했습니다. 물론 잊어버립니다. 방송을 통해 보이는 모습이 '연출'이 있다는 사실을. 그래서 그 모습을 온전히 믿지도, 안 믿지도 않습니다.

2002년 한국은 월드컵으로 거의 100도씨의 물처럼 팔팔 끓고 있던 시절입니다. 축구에 전혀 관심이 없는 이들 조차 거리로 뛰어나가 열광적인 응원을 했습니다. 그것은 문화적으로도 거대한 축제였으며, 한국사에서도 길이 남을 위대한 퍼포먼스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누굽니까. 왜 제 스스로 50을 바라보는 나이에 9oC라는 이름을 붙였겠습니까. 저는 아무리 봐도 아싸 기질을 타고난 사람입니다. 대중적인 것과는 거리가 9 off centerline이라는 의미처럼 중심에서 한참을 벗어난게 어쩌면 이 삶에서 제가 가진 아이덴티티며, 그것이 어떤 식으로든 이번 생에서 저를 배우게 하는 중요한 요소 같습니다.

전 축구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리 재미도 없고, 즐기지도 않는 편입니다. 그런데 월드컵이면 응원을 한다면서 옷을 차려입고 일종의 세리머니를 즐기는 분들을 솔직히 저의 관점에서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또한 일종의 틀이죠. 그런데 그 틀이 편하고 선명할 때가 있습니다. 가식적일 필요가 없고, 확고합니다.

난 '구'자 들어가는 거랑 친한 게 딱 하나 밖에 없어. 지구

야구, 축구, 농구, 배구... 각종 구자가 들어간 것들을 좋아도 하지 않고, 잘하지도 못합니다. 작년에 야구장이란 데를 처음 가보았습니다. 5회까지 보고 나오면서.... 이런 느낌이구나 정도. 생각보다 야구장이 작구나. 그게 다였으며... 그 지랄 맞은 주차와 도로 막힘이 한 20배는 더 야구에 대한 이미지를 각인시키더군요.

그게 뭐?

그래서 일까요? 그 2002년 서로 축구경기를 보겠다며 회사를 좀 일찍 마치자부터, TV를 가져다 놓고 응원을 하자는 의견 등등, 당시 사회 초년생인 저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축구 팬들이 많았나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컴퓨터 통신 커뮤니티에서 미선이 효순이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정말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에 따른 집회들도 했지만 제지를 당했었죠. 당시 진보정당이 집권을 했을 때였는데도 그러했습니다.

(당시는 저의 정치 색깔도 없었습니다. 그냥 정치란 도둑놈들 정도의 사고)

출처 : 한겨레 신문

대한민국 남쪽 끝에 사는 저로써는 그런 이야기들이 생경했습니다. 우리 도시는 일단 빨강당이 거의 우세한 곳이었으며 부모님들 조차 아들인 저에게 누구를 꼭 뽑으라고 지시를 할 정도, 뭐 이런 전통은 지금도 어딘가에서 계속될 것입니다.

그래서 시위라거나, 소요사태 등을 살면서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딱 한번 버스틀 타고 가다가 최루탄 가스가 눈을 찔렸던 간접 체험정도가 전부.

주민등록증이 나오고 나서는 일할 곳이 없어지는 고향에 남을 것인가 외지로 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더 컸지, 정치적인 것에는 아무런 인식을 할만한 이슈들이 없었으며, 오직 공중파 TV에 비치는 것을 통해 사회 전반적인 흐름을 이해할 뿐이었죠.

그런 저에게 두 중학생이 장갑차에 깔려 죽었지만, 일반 교통사고보다 못한 대응 처리에 분노가 치밀었습니다. 하지만 진짜 분노는 무엇인 줄 아십니까?

당시 커뮤니티를 통해 2002 월드컵 3,4위 전을 놓고 터키와 한국의 경기가 남았습니다. 4강이라는 위대한 승리와 역사를 이끌어내었으니, 이제 딱 한번 조금은 아쉽지만 그동안 계속된 승리의 쾌감을 즐기고 싶은 대한민국의 수많은 붉은 악마들

저는 붉은 악마가 되어본 적이 없습니다. 히키코모리였냐구요? 뭐 맘대로 생각하셔도 상관은 없지만 초지일관, 난 별로 축구를 좋아하지 않아. 그래서 전 어쩌다 시간이 되면 보면서 재밌어할 뿐 (그래도 한국인이니) 굳이 일부러 경기를 보려고 애쓰지는 않습니다. 그때도~, 지금도~

그리고 거기엔 당시, 마지막 경기를 하러 갈 때, 검은 리본을 하고 경기장에 참석하자는 일종의 전 세계가 주목하는 경기에 SOFA로 인한 안타까운 죽음에 대한 적절치 못한 대응에 대한 항의를 하자는 여론이 일었습니다.

정말 간절한 글로, 경기장에 참석하는 분들에게 검은 리본을 달아달라는 호소들이 커뮤니티를 통해서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저 또한 직접 경기장은 갈 수는 없었지만, 호소의 글에 동참했으며, 어쩌면 그런 기적이 일어날 거라는 기대를 했었습니다.

그러나 반대여론의 글들이 올라왔습니다. 국가적인 대 축제에 무슨 찬물을 끼얹느냐는 아주 차가운 목소리들. 뭐 틀린 말은 아니지만, 아마 자기가 그런 억울한 일을 당한다면...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솔직히 공감 부족이죠. 아마 이 글을 읽고 계신 대다수의 분들이 경찰에 끌려가보거나 법정에 서 본 경험이 많지 않으실 겁니다. 저는 당해보았습니다. 그럼 참, 이 나라의 법치라는 것이 얼마나 허술한지 경험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고 무슨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언제까지 개인의 도덕성에만 기대며 살 것인가, 언제까지 누군가 앞장서 주기를 바랄 것인가.

그저 저 붉은 응원 복에 검정 리본 하나 달아주길 바랬을 뿐입니다 (출처: 한겨레 신문)

그리고 그 검은 리본 운동의 결과는 여러분 중에 2002년을 겪은 사람이라면 잘 알 겁니다. 아무것도 이슈화되지 않았고 아무런 일도 없는 듯 묻혔습니다.

그저 그 붉은 악마의 가슴에 검정 리본 하나를 달아주길 바랬던 것 뿐입니다.

 

언제 이 일이 세상에 알려진 줄 아십니까? 바로 강풀 작가가 만화를 통해서 몇 년이 지난 뒤에 재조명하면서부터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집단지성보다 대중의 우매함을 더 믿는 편입니다. 철학자로 말하자면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목도한 플라톤 같은 것이겠죠.

그제야 대중들은 미선이 효선이의 이름을 거론하며 언론에 시끌벅적 떠들었습니다.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요? 참 한국사람들 가식적이구나. 정말 냄비구나. 어우... 역겹다.

출처 : 미디어 투데이

물론 그 하나하나의 객체에 대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전체의 한국이라는 집단에 대한 경멸감 같은 것이 생겼던 것도 사실입니다. (물론 뒤늦게라도 전 국민이 알게되어 다행이지만, 2002년에는 왜 그토록 차가웠을까? 그놈의 붉은 악마 도파민에 취해서였을까?)

그리고 그때 깨달은 게 하나 있습니다. 비록 20대 말이었지만, 이 세상은 그렇게 머저리처럼 흘러가지만, 또 누군가는 나서서 옳은 목소리를 내고, 저항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그런데 그 역할이라는 게 그렇게 즐겁거나 유쾌하지 않습니다. 그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처절하기도 하고 외로운 싸움 같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싸워서 어쩌다 승리하게 되면 그 이익은 모두가 취하는 정말 불공정한 게임을 하는 것이죠.

그래서 전, 20대에 가지고 있던 제 안에 있던 그런 성향에 대해서 버리고자 마음을 먹었습니다. 세상일에 관심 끄고 누가 정치를 하던, 누가 죽던 애 알바 아니다. 그냥 나는 내 살인이나 걱정하는 게 맞다. 그래도 누군가는 그 역활을 하게 되어 있다. 그러니 걱정말자.

 

굳이 내가 그 역활을 하기 싫다. 전체의 이익을 위해 왜 나서야 하는가? 싫다. 정말 싫다.

이렇게 글을 적는 것에도 시간과 열정이 듭니다. 왜 그런 일을 타인을 위해 해야 하는 것이죠? 오직 나를 위해 사용하는 게 현명한 게 아닌가요? 실제로 우리 사회를 바라보면 이기적이며, 타인의 고통에 고개 돌리는 이들이 그 개인의 삶에 있어서 좀 더 나은 평가 - 흔히 사회적 성공을 하고 있지 않나요?

구글 검색에서 1인 시위로 검색했을 때 화면 캡쳐

 

그렇게 30년이 흐른 이 시대에도 그 법칙은 여전합니다.

어제 유시민 선생이 매불쇼라는 프로에서 제가 20대에 경험하고 체험하며 깨달은 것을 좀 더 통찰 있게 설명하시더군요.

우리는 2가지 부류의 사람이 있다. 하나는 본인의 생존에만 집중하고, 또 그런 중에 어떤 사람은 생존과 전혀 무관하며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어떤 가치관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전자는 생존과 관련되면 어떤 일이든 하고, 후자는 가치에 위배되면 스스로의 생존을 포기하는 일까지 행한다. 과연 어느 것이 유전자에 맞는 행동일까?

출처 : JEDI'S ENGLISH

당연히 전자일 겁니다. 그러니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죠. 그런데 말입니다. 우리가 마음공부라는 것을 하다 보면 결과적으로 도달하지 못한 피안(산스크리트어로 GATE),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바라'

즉 여기가 아닌 저곳으로 건너가자는 것이 최종의 성취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인간세상에서는 영원한 것이 없습니다. 내가 그토록 이룬 세상의 성취들, 개인의 업적들은 죽은 뒤면 모두 사라집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갈 때 가져갈 거라고는 단 하나도 없지만, 우린 계속 무언가를 가지려고 합니다. 자신의 생존 그 이상을 욕심하죠. 그러나 진실은 결국 죽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삶이 더 나은 것일까요? 무엇인 진짜 이 거대한 우주에서 참된 삶일까요? 모릅니다. 저도. 모르기에 그저 살아갈 뿐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느껴집니다. 나 개인이 오늘 맛있는 것을 먹은 것은 2,3시간이 지나면 없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내가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이고, 누군가에게 행한 도움은 큰 1년, 10년이 지난 뒤에도 제 마음에 남아 있음을 압니다.

그 당시 그토록 검은 리본을 하나 달아달라며, 마치 제 일처럼 노력했던 시절의 기억, 그리고 절망감, 한국이라는 나라에 사는 다수에 대한 원망, 그리고 그런 노력에 오히려 재를 뿌리는 사람들의 기억

 

물론 세월이 흘러 노랑리본으로 그 바램의 일부가 이루어졌지만, 그 또한 여전히 비난하는 분들이 많으시죠. (저는 개인적으로 이재명 대표가 그런 분들에게 똑같이 겪으시라고 덕담한 것을 좋아합니다. 아마도 우주의 카르마는 그 일을 이루고 있는지 모릅니다.)

국가의 행사에 찬물 끼얹지마!!. 이건 지금도 유효합니다. 이젠 아얘 돈을 받고 그런 전문적인 일을 하는 조직도 암암리에 있으며, 어느 카페든 정치이야기를 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대학시절 동아리 회장을 맡은 적이 있는데, 동아리 내 연애금지 같은 거죠. 꼭 그런 일이 있으면 분란이 일어나거든요.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사람이 살면서 당연히 나눠야 할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삶과 연계되는 일들이죠. 그런 와중에 몇 가지 취미를 가지고 또 취향에 맞는 사람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그런 모임 같은 것이죠.

따지고 들면 더 큰 범주는 사회이며,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치입니다. 정치는 경제를 움직입니다. 당신네들이 살면서 취미란 것을 할 수 있는 것은 먹고살만하기 때문입니다. 그 근간의 고마움이 없이 지금도 피켓을 들고 차가운 바람 앞에 나가서 싸우는 이들을 비난할 수 있을까?

솔직히 그들도 우리와 같은 부류의 사람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하늘은 그에게 시련을 주었고, 그러한 역할을 부여한 것일 겁니다. 운이 좋은 건가요? 운이 나쁜 건가요?

그건 결코 우리가 알 수는 없습니다. 빛과 긍정, 그러나 그 반대에는 반드시 그림자와 부정이 있습니다. 그것은 같이 존재하는 것이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의식이라는 이름으로 감추려들고 속여봐야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는 것이죠.

그것을 이해하고 불씨를 꺼트리는 것, 그것을 이해하고 그 모든 것을 사랑하는 것. 그것이 아마도 인류를 이끄는 거대한 두 종교의 가르침일 것입니다.

법화경과 관련된 책을 오늘 2독을 마무리할 작정입니다. 결국 우리 모두가 하나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살아갈 수 있는 것에는 누군가의 노력과 누군가의 피로 이루어진 것임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그것은 어쩌면 , 과거의 당신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요한 계시록에 나온 것처럼 인간의 영혼은 어쩌면 한계가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그 나머지들에게는 어쩌면 영혼이랄만 한 게 없을지도 모르죠. 사람이 사람다와지는 것, 인간이 인간다와지는 것. 신의 형상을 빌려 창조되었다는 믿음을 만들었을 때, 그 스스로를 여러 동물들보다 특별한 존재로 만들고 싶었던 그 욕구와 상상.

그럼 지금 우린 어떤 상상을 하며 살아가는 걸까요?

당신의 심상화는 커피잔 안에 따스함은 아닐까요?

 

사회는 진화하고 있습니다. 빙글빙글 돌아가며...마치 책바퀴 도는 듯 하지만.. 조금씩 상승하고 있습니다. 다만 어제 유시민 선생님 말씀처럼, 지금의 한국은 뭔가 PICK를 치고, 그 방향이 아래로 향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우려가 되네요.

 

참 이럴땐 아이가 없다면, 될데로 되라지하고 마무리 하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네요. 어쩌면 그런 마음이 이런 글을 쓰게 만드는 이유겠죠.

 

더 나은 세상, 오늘보다는 좀 더 타인의 손을 잡아줄 수 있는 믿음과 신뢰의 사회가 되길 기도합니다. 아멘